해외여행/이스라엘

이스라엘 여행 1 예수 세례터/마사다 (2023년 2월)

바위다섯 2023. 3. 3. 20:52

요르단 암만에서 1박하고 알렌비 국경을 통과하여 이스라엘로 갔다.

 

이스라엘 요단강변 하류에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님 세례터(까스르 엘 야후드)로 향했다. 

 

까스르 엘 야후드

예수님 세례터로 추정되는 곳이 몇군데 있으나, 이 곳과 좁은 요단강 맞은편에 요르단의 세례터 알마 그타스가 유력하다고 한다. 

 

요단강 예수 세례터(까스르 엘 야후드); 이스라엘 측

건너편이 요르단측 세례터(알마 그타스)이다.

 

방금 세례를 받고 나오신 분들. 모두 흡족한 모습이다.

 

요르단측 세례터(알마 그타스) 전경.

 

방금 세례를 마치신 분들과 양해를 구하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사해를 끼고 남쪽으로 마사다로 향했다.

 

사해

 

마사다 요새 모형

 

마사다로 가는 케이블카 승강장

 

마사다

높이 450m의 언덕이다.사방이 절벽으로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이다. 정상부분은 운동장처럼 평평하다. 정상부분의 크기는 길이가 약 620m, 폭이 약 250m이다. 이곳은 유대 역사상 잊을 수 없는 비극의 현장이다. 마사다는 유대 왕 헤롯(BC 37~4)이 유사시 피할 수 있는 요새 궁전으로 지어졌다(BC37~31). 헤롯은 정상에 3층 궁전을 지었고, 저수장과 곡식 창고도 만들었고 1,300m에 달하는 성벽도 쌓았다.

   헤롯이 죽은후, 로마 제국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으나, 로마 티투스 장군에게 진압되었고 끝까지 저항하던  967명의 유대인들이 마사다로 이동했다. 이들은 엘리아상 벤 야일을 지도자로 저항을  계속했다. 로마 군대는 3년간 포위 공격끝에 마사다 정상부분에 이르는 토담 경사로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서기 73년 5월 토담 경사로를 타고 올라간 로마군은 성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으나, 날이 저물어 일단 퇴진했다. 다음날 새벽 마사다를 공격한 로마군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다.

로마군대가 성벽을 부수기 시작한 날, 유대인 지도자 벤 야일은 960여 동지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했다.  비굴한 항복이냐, 로마인의 칼에 의한 죽음이냐, 벤 야일은 제3의 선택, 자유인으로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택했다. 율법에 자살은 금지되어 있으므로 먼저 처자식을 칼로 죽였고, 남자들은 제비를 뽑아 10명을 뽑고 이 10명이 나머지 남자를 죽이고, 다시 1명을 뽑아 9명을 죽이고 최후의 1명은 자결하므로, 960명이 죽었고 7명이 살아 남았다.  여인 2명이  5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몸을 숨겼다. 살아남은 2명의 여인과 5명의 아이들이 최후의 증인들이었다. 당시의 유대인 역사가 요새퍼스는 이들의 증언을 그의 책 '유대인 전쟁기'에 기록하여 남겨 놓았다.

 

   마사다가 함락된후 135년에 하드리아누스 로마황제때 유대인들은 강제 해산되어 1945년 건국될 때까지 세계 각처에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나라없는 신세가 되었다.  (박준서 저 '성지순례'에서 인용및 참조).

 

사해가 내려다 보인다.

 

마사다 요새는 1838년에 두 미국인 학자에 의해 발견되었고, 1963~1965년에 발굴되기 시작하였다.

 

헤롯왕은 3층의 궁전을 지었다.

 

성벽을 쌓고, 38개의 탑을 세웠다.

 

물 저장소

 

빗물을 저장고로 모으는  수로 원리 장치를 시연하는 관광객.

 

로마군대가 마사다를 함락시키기 위해 쌓은 토담.

 

검은선 아래는 옛 원형 그대로 위는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마사다 박물관

마사다 요새를 관광하고 사해를 끼고 다시 북쪽으로 가서 쿰란으로 갔다.